하이데거 이야기를 꺼내니 필연적으로 장소와 공간에 관한 이야기로 귀결되었습니다. 공간과 장소 중 어느 쪽이 선행하느냐, 그것은 한마디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뭐랄까, 이 두 개념 자체가 설명하기 복잡한 것도 없지 않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두 개념 말고 뭔가가 더 있는 것 같단 말이죠. 인간과의 관계로 설정되는 장소와 추상화된 개념의 공간. 정말 이걸로 끝일까요? 그렇다면 인간이 설정한 인과관계가 없는 공간은 장소가 아닐까요? 또는 장소가 가져다주는 느낌이나 인상이 정말 100프로 인간이 설정한 인과관계의 매커니즘에 따라 작동되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물론 이를 알아가기 위해 우리가 이전까지 해왔던 다양한 논의와 같이 수많은 철학적, 과학적, 수학적 접근들이 지금도 활발히 연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예술철학에선 다소 고전일 수 있는 매우 문과적인(?) 접근을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이해를 돕기 위해 좀 전까지 계속되었던 공간과 장소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가겠습니다. 한 공간이 건축가에게 주어집니다. 건축가는 이 공간을 장소로 바꾸기 위해 추상화 된 가상의 공간을 보며 고민합니다. 재질, 높이, 구조, 배치... 자신이 의도한 인상을 모두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여 장소를 설계합니다. 그리고 설계대로 장소가 만들어집니다. 이때, 이 장소는 건축가의 상상을 현실에 재현한 레플리카로 모두에게 각인이 될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만든 사람은 건축가지만, 이 예술로 승화된 장소는 건축가가 의도하지 않은 별개의 독자적인 의미와 영향을 갖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개념을 예술의 자율성(Autonomy)라고 합니다.
예술의 자율성은 18세기부터 거론된 예술에 대한 개념 중 하나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칸트, 루소와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철학이 대두되면서부터 나타난 개념인데요, 이 개념의 요지를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술의 자유”입니다. 예술을 모방의 개념으로 보았던 이전의 견해와는 달리 예술작품 그 자체가 인간의 도덕적, 미적 판단의 대상에서 벗어난 존재로 보는 시각이 바로 예술의 자율성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예술의 자율성 덕분에 예술 자체는 물론이고 창작자와 감상자 또한 이전보다 더 많은 자유를 얻었죠. 도덕적, 사회적 잣대에 영향을 받지 않고 예술 그 자체에 대한 탐구를 하려는 시도가 바로 예술의 자율성이란 이름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방가르드,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 그리고 더 나아가 현대의 실험적인 예술작품들이 이러한 예술의 예에 해당한다 볼 수 있습니다. ‘예술가’라는 직업의 종류가 생긴 것도 바로 예술의 자율성의 비호 아래였죠. 지금은 이 개념이 확대되어 이러한 창작물을 만드는 예술가 직업군이 음악가와 화가에 그치지 않고 지금은 건축가, 재봉사와 같은 과거 장인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직업군까지 아우르게 되었습니다.
PWassily Kandinsky: Ohne Titel (1923)
이 개념은 또한 창작자 뿐 만이 아니라 감상자에게도 예술의 자유를 선사하였습니다. 이전에는 사회가 규정한 도덕적 규범에 따라서만 예술작품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해석할 수 있었지만 예술의 자율성 개념이 나타난 후 부터는 감상자의 자유로운 해석이 가능해졌죠. 만약 이러한 예술의 자율성이 없었다면 벤야민이나 아도르노의 미학은 나올 수 없었을 겁니다. 더 나아가 오르세 기차역이 미술관이 될 일은 없었을 것이라 얘기할 수 있습니다. 감상의 자유가 없었다면 감상자를 위해 모두에게 개방된 박물관 또한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루벤스가 그린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보고 얼굴이 참 섹시하다는 생각은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어디 감히 신성한 예수님의 형상이 그려진 그림을 보고 예수님의 얼굴 따위나 뜯어먹고 있나요. 물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저는 독실한 무신론자이기 때문에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Paul Peter Rubens: Ecco Homo (1612)
무엇보다 예술의 자율성은 예술 작품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예술작품이 도덕적,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추상적, 상징적 모방이 아닌 “예술”이 될 자유의 기회를 마련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창작자가 만들어 낸 예술작품들은 그 종류만큼 다양한 감상을 부여받으며 스스로의 가치를 높여나갔습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예술작품의 가치의 원인이 단순히 창작자의 의도와 인과관계 또는 감상자의 경향이라 한 마디로 말할 수 없습니다. 이미 스스로가 예술이 된 예술작품은 그 자체가 가치를 갖는 무언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다음과 같은 물음이 다시 예술에 돌아옵니다: “왜 저게 예술이지?” 자, 이젠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다시 찾는 역학조사가 필요한 때입니다. 그 해답을 찾는 날이 언제가 될 진 모르지만요.
공간과 장소에 관한 논의에서, 장소성이란 기하학적 · 수학적으로 서술되는 공간의 물리적 특성 이상의 의미를 띠는 무엇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그의 공간에 관한 서술에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물이 있어야 할 곳을 기능에 따라 고려하는(교탁은 책상들의 앞에) 것으로서 공간을 해석하는 것이며, 수학적으로 계산되는 3차원의 공간이 선행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수학에서의 공간에 관해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수학이란 개념의 언어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수학은 사물의 수많은 구체적인 특성들 중 관심이 있는 부분에만 집중하기 위해 곁가지를 쳐서 그것의 '원하는 속성' 의 본질에 다가가려는 시도입니다. '하나', '둘', '셋' 은 이 세상의 어디에도 없고, 완전한 '원' 도 세상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지만 우리는 몇 무더기의 과일을 놓고 그것을 하나, 둘, 셋으로 '수량' 을 셀 수 있고, 사물이 '원' 모양을 하고 있을 때 다른 모양, 예를 들어 '사각형' 보다 더 잘 굴러간다고 서술할 수 있습니다.
1) '원 모양' 으로 만든 바퀴 ⓒPhoto by Jon Cartagena on Unsplash
2) 수학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그린 원
이와 같이 수학은 구체적 현실을 말하자면 한 단계 번역, 혹은 필터링해서 시작된 학문이기에, 수학이 각종 기호들을 동원해 그 고유의 체계를 갖추고 수천 년간 발전해 온 지금 우리가 수학의 언어를 볼 때 그것은 현실에서 동떨어진 추상적 논리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수학적 공간' 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이지요.
가장 기본적으로 생각되는 수학적 공간은 역시 앞에서도 언급되었던 데카르트의 좌표계일 것입니다. 가로의 x축, 세로의 y축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2차원의 평면 공간이고 거기다 깊이인 z축을 추가하면 3차원 공간이 된다고요. 이런 식의 표현, 즉 내 방의 크기가 가로로 2000밀리미터이다, 하는 서술은 사실 이상의 의미와는 다른 종류로 보입니다.
그런데 현대 수학의 응용 분야들에서는 수학적 공간에서 숫자들로 표현되는 의미를 다루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의미를 숫자로 번역하고 계산하는 아이디어들을 계속해서 개발해 나가고 있다고 해야겠습니다.
다음은 벡터 공간에서 표현된 단어 사이의 의미 관계를 시각화한 그림입니다. 여기에서, 명사의 성별, 동사의 시제, 국가와 수도의 관계와 같은 개념들이 각각 하나의 벡터로 표현됩니다.
3) ⓒGoogle Developers Machine Learning Course
벡터는 관계 자체가 될 수도 있고('한국' 에다 '국가-수도' 관계의 벡터를 연산하면 결과로 '서울' 이 튀어나옵니다.),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한국' 을 표현하는 일련의 숫자 집합들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은 무엇일까요?
수학적으로 표현된 현실에서의 개념이라는 다소 낯선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차근차근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일단은 '한국' 이라는 숫자의 집합으로 된 벡터가 존재한다고 치자고요. 이 때, 컴퓨터로 '한국' 을 열어 보면, [ 0.351, 0.178, 0.904 ... ] 같은 숫자 목록들이 보입니다.
그러면 '한국' 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한국이 다른 무엇들과 구분되기 위한 특징들을 여러 가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리적 위치가 될 수도 있고, 그에 따른 특징적인 기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용하는 언어, 구체적인 문화 요소, 예를 들면 사람들은 어떤 음식을 먹는지, 인구 분포는 어떤지, 그리고 일단은 이 개념이 국가라는 카테고리에 속한다는 정보까지.......
사람마다 물어보아도 '한국' 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각자 다를 것입니다. 누군가는 한국의 구조에 관심을 가지고 대답할 수 있고, 누군가는 내가 살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요. 같은 공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인상을 물어도 사람마다 대답이 다른 것처럼 말이지요.
'한국' 벡터가 구성되는 방법도 이와 같습니다. 나라의 지리적 구조에 초점을 맞춘 채 각 나라를 벡터로 표현할 수도 있고 문화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이 때, 지리에 초점을 맞춘 '한국' 벡터와 문화에 초점을 맞추어 세부를 구성한 '한국' 벡터는 서로 다른 숫자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결국 < 세계로부터 개념을 뽑아내어서 표현하는 방식 > 이라는 수학의 원론적 정의와 다르지 않은 셈이죠.
이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숫자의 개념으로 과일들의 갯수를 셀 수 있었던 것처럼 수학의 공간은 실제 세계를 번역하여, 마법 같은 연산들을 통해 의도한 결과를 찾아냅니다. 풍경을 보고 어떤 느낌이 드는지를 말하기(정확히는 사람들이 이 풍경을 보고 어떤 느낌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예측하기), 이 고양이는 지금 나를 경계하고 있는지 친근하게 여기는지를 판단하는 일들 따위를 하지요. 이 과정에서 학자들은 인지과학과 심리학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구체적' 이고 '당연하다' 고 여기는 세계의 법칙들을 어떻게 번역하는지를 들여다보아 활용합니다.
우리가 경험으로서 대상을 처음 만나게 되는 것처럼, 그리고 대상의 관찰과 경험이 실은 맞물려 있는 것처럼, 추상화한 언어는 구체적인 세계와 이어져 있고, 그렇다면 결국 공간과 장소도 완전히 동떨어진 개념이 아니라 서로를 해석하고 구성하는 가능성을 품고 있는 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오늘의 글은 포석만 깔아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공간space과 장소place에 대해 먼저 설명해야 하거든요. 하이데거가 건축 이론에서 자주 소환되는 이유 또한 여기 있습니다. 건축학 개론 1강에서 배우는 것 또한 공간과 장소의 개념입니다. 도시와 건축에 관심이 있다면 알고 있을 개념이지요.
먼저 정의를 살펴봅시다. 여러 검색 결과를 종합하면 공간이란 3개의 좌표측에 의해 기술될 수 있는 삼차원적 무엇입니다. 눈을 감고, 감기에 걸린 데카르트가 되었다고 상상해보세요. 엇, 천장에 날라가는 파리가 보입니다. 저 파리의 위치를 설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천장의 모서리를 영점으로 잡고, x축-y축-z축을 그리면.. 파리의 위치를 세 점 (p1,p2,p3)의로 정의할 수 있지요. 건축에서의 공간 또한 이 관념론적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있지 않습니다.
이사할 때 쓰자고 그렸습니다
이것은 제가 현재 거주중인 집의 간략한 도면입니다. 제가 지내는 방은 가로 3000 X 세로 3900 X 높이 2300의 공간입니다. (단위 : 밀리미터) 문의 폭은 900이고, 벽의 두께는 200입니다. 저는 공간으로써의 제 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한 건축과 관련한 정보를 수리화, 단순화하는 과정이 필수적으로 들어가기에 공간은 추상적인 개념입니다.
건축물을 기술하는 글에서 < 공간감이 좋다 >는 표현을 아마 자주 보게 될 겁니다. 여기서 공간감이란 건축의 기하학적 정보값이 주는 인상을 의미합니다. 천장이 높은 집의 공간감은 시원합니다. 비례가 애매한 건축의 공간감은 썩 아름답지 못합니다.
여기서 주의를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건축의 언어는 철학의 언어만큼 명료하지 못합니다. 어쩔 수 없는 한계입니다. 철학적 사유는 현실을 개념화하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따라서 제시된 개념을 정교화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이 철학적 논의의 기초입니다. 그러나 건축은 추상화하기 애매합니다. 이론으로만 해석하기에는 너무나 다층적이고 현실과 직접적으로 맞닿아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언어의 미끄러짐이 있더라도 느낌적 느낌으로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장소place란 무엇일까요? 32평형 아파트, 102층의 고층빌딩, 천장이 5m나 되는 표현으로는 건축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마치 < 투룸방 >이 < 내 방 >을 의미하지 않는 것 처럼요. 벽에는 약간 반사되는 엠보싱 벽지를 발랐고 문틀은 짙은 색이라는 물리성에 대한 추가적 설명도 < 내 방 >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덜컥거리는 나무 창틀이 안 닫혀서 난리를 부리고, 쓸어도 쓸어도 머리카락이 나오고, 벽에는 모기 시체가 있고, 털어도 털어도 먼지가 나오는 책장이 있는 곳이 바로 내 방입니다. 공간에 의미가 덧씌워지면 비로소 장소가 됩니다.
누군가에겐 그냥 사진이지만, 누군가에겐 추억의 장소이지요
장소는 장소성을 가집니다. 프랑크푸르트 대학교는 아도르노가 공부하던 장소이고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논쟁하던 장소이자 스엠씨가 학식 굴라쉬를 먹는 장소입니다. 저에게 프랑크푸르트는 진짜 맛있는 학센을 먹었던 장소이구요. 이러한 집단적 혹은 개인적 기억이 쌓여 장소성을 형성합니다. 장소는 기억합니다. 경험이 있기에 공간은 장소가 되어 깊은 의미를 창출합니다. 광화문 광장, 서울 시청, 한강 등이 한국인에게 특정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큰 빈터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터에서 사람들이 모이고, 시위하고, 환호했기 때문이지요. 여전히 용어가 애매하지만, 우리의 삶이 애매한 것을 어떡합니까.
저는 공간과 장소의 개념을 건축학개론 1강에서 배웠습니다. 정확히 첫 수업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극초반이었던 것 하나만은 확실해요. 그럴 법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건축은 공간이 아닌 장소를 만들려 하기 때문입니다.
근대 건축가들, 모더니스트들은 건축의 역할은 좋은 공간을 만드는 데 있다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장식은 범죄가 되어 자취를 감추었고, 가장 순수하답시는 기하학적 형상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집은 사는 기계가 되었고, 도시는 일하는 곳과 쉬는 곳으로 분해되었습니다. 모더니즘은 공간의 미학을 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표백된 공간에 대한 집착 때문에 게토가 생기고 엄청나게 많은 '근대적'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현대의 건축은 모더니즘에서 벗어나려고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고 이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물론 공간과 장소의 차이도 참 애매합니다. 경험과 기억이 공간을 장소로 만듭니다. 그런데 공간을 인식하려면 또 경험이 필요하단 말이죠. 아니 그래서 뭐가 뭐란 말이냐 하는 학생들의 질문에 저희 교수님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여간, 앞으로의 에세이에서 공간space과 장소place는 끔찍하도록 자주 보게 될 것입니다. 이제 마음이 좀 놓입니다. 이 두가지의 키워드 만으로도 앞으로의 논의를 채워나갈 수도 있어요. 이를테면 고대 그리스부터 내려온 수리적 미학의 집착이 르네상스 건축의 질서를 만들고 이는 근대기의 절대 공간 탄생을 야기하고 절대 공간은 히틀러의 무대적 도시건축으로... 이번 텀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